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테오도르 몸젠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1817년 덴마크의 왕이 다스렸던 슐레스비히 지역의 가르딩에서 [[루터교회]]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. 지역이 지역인만큼 [[덴마크]]의 혈통[* 국적별 의미만 있을 뿐 혈통 구분은 무의미하다. 어차피 덴마크, 프로이센,오스트리아, 작센, 바이에른 등등은 모두 독일 및 독일어 문화권에 속하기 때문이다. 사실 정작 독일 내 출신자라 해도 혈통으로 보면 체코나 헝가리 기타 슬라브 계 혈통도 있고 독일 외 인접국 출신이라 해도 독일인 혈통도 상당수 있었기 때문에 덴마크 출신이라 해서 이를 덴마크 혈통이라고 구분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]도 꽤나 섞인 가계였지만 본인은 '''평생 스스로를 독일인이라 생각했고''' 실제로도 그에 걸맞게 행동했다. 고전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바탕으로 학위를 수여받은 데 이어 1837년에는 홀슈타인에 있는 킬 대학교로 진학하여 법학을 전공했다.[* 당시 법학의 중심지는 괴팅겐이었지만 괴팅겐에서 유학할만큼의 돈이 없어서 집 가까운 킬 대학교를 갔다고 한다.] 그렇지만 이 시기 킬 대학교에서 로마법을 주전공으로 연구하면서 훗날 그의 로마사 연구에 지대한 도움이 되었다. 이후 덴마크 왕실의 장학금을 바탕으로 몸젠은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 옛 로마 제국의 영역들을 여행하면서 당시까지 보존된 로마의 문서들을 연구하는 기회도 얻었다.[* 법대 시절 소일거리삼아 친구들과 시집을 하나 냈는데, 이 책이 덴마크 왕의 마음에 쏙 들어서 장학금 수혜자로 뽑혔다는 소문도 있다. 물론 어디까지나 카더라... 그리고 이 시집은 나중에 몸젠이 명성을 얻은 뒤 인기 대폭발...] 그렇지만 [[3월 혁명|1848년 혁명]]의 와중에 몸젠은 종군기자로 활동하면서 [[프로이센]]의 [[슐레스비히-홀슈타인]] 합병을 지지했고, 그로 인해 덴마크인들의 분노를 사게 되어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.[* 결국 이 땅은 20년 뒤에 [[오토 폰 비스마르크|비스마르크]]가 덴마크와 전쟁을 벌여 손에 넣었다.] 뭄젠은 고향을 떠나 [[라이프치히]]로 이주하여 [[라이프치히 대학교]]에서 법학 교수로 임용되었다. 그의 학문적 명성은 날이 갈수록 높아져 1857년에는 베를린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초빙되고, 1861년부터는 [[베를린 대학교]]의 로마사 전담 교수까지 겸임했다. 학문적 성취와 그에 따른 명예가 나날이 높아졌지만, 아무래도 최고점은 몸젠 본인의 저서 《로마사》(Römische Geschichte)를 통해 1902년 [[노벨문학상]] 수상자로 선정된 것이다.[* 100년이 넘는 노벨문학상 역사상 정말 몇 안되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비문학 작가이다. 1950년대 이후부터는 애초에 노벨상 위원회가 문학작가에게만 상을 주었는데, 2015년에는 수필가, 2016년에 '''가수'''로서 비문학 작가에게도 수여했다.] 이러한 명예의 절정에서 1903년 몸젠은 향년 85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